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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열정(Passion)
본문: 요2:13-22
1.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열정입니다. 열정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니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열렬한 애정을 가진다. 그 뜻을 깊이 생각해보면 결코 쉬운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구본형이라는 분은 그의 저서‘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고 싶지만 잘 못하는 일은 그대와 인연이 닿지 않는 것이다. 옷소매조차 스치지 못한 인연이니 잊어라. 하기 싫지만 잘하는 일 역시 그대를 불행하게 만든다. 평생 매여 있게 하고, 한숨 쉬게 한다. 죽어서야 풀려나는 일이니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일과 잘하는 일을 연결시킬 때 비로소 그대, 빛나는 새가 되어 하늘을 날 수 있다.” 열정을 유지시켜 주는 요인은 승리다. 조금씩 성취를 경험하고, 승리를 체험해야 더욱 신이 나서 일하게 된다. 연필은 항상 스스로를 깎아내는 노력 없이는 선을 그을 수가 없다. 가장 뾰족하게 깎은 연필만이 가장 가는 선을 그을 수가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 한홍이라는 분의 리더쉽 강좌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열정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성격, 비전(vision)이 자신이 하는 일과 딱 들어맞을 때 더욱 강렬하게 타오른다. 그런데 국제노동기구(ILO)의 보고서는 한국인을 세계최고의 일벌레로 꼽고 있지만, 우리의 직장 만족도는 OECD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돈 많은 사람들은 많이 보이는데, 꿈 있는 사람들은 별로 안 보이는 것 같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많은 직장인들은 일을 많이 해서 그런게 아니라, 진정 자신이 좋아하거나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지 못해서 그렇다. "
상당히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열정하면 어떤 생각이 떠 오르십니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일에 대한 열정을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은 신앙에 대한 깊은 열정을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부끄럽게도 열정을 생각하면서 옛날 총각시절 제 아내와 데이트하던 시절을 떠 올렸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그 시간 설레임과 가슴 가득한 포만감, 차오르는 기쁨 등등..... 위에서 이야기한 의미로 풀이하자면 제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그녀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성취감과 기쁨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런 열정을 두 번 다시 경험하기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그 분의 사랑을 체험하고 전하는 일에, 이전에 맛보던 그 열정을 가지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이 ‘열정’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2.
여러분은 2004년 멜깁슨이라는 감독이 만든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제목을 직역하면‘그리스도의 수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상영될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며 주님의 수난과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다시 한 번 십자가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국내에도 크게 호응을 얻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히트친 영화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상당히 시간이 지난 후에 보게 되었습니다만 영화가 가진 사실적인 예수님의 고난의 묘사는 아직도 뇌리에 선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의 기도로 시작되는 영화의 전체 스토리는 십자가를 향한 예수님의 고난과 깊고 깊은 번민과 갈등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영상은 예수님의 수난(Passion)을 극대화하고 사실적인 영상으로 담으려는 제작자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멜깁슨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보니 마리아에 대한 해석과 의미를 많이 집중하는 의도를 보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비통한 마음과 눈으로 쳐다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참으로 처절한 아름다움을 보이기도 합니다.
기억하시는 분이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저는 특별히 인상적인 장면을 기억합니다. 예수께서 그 엄청난 고문과 매질을 당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간 후 거의 숨이 끊어질 지경에서 옆에 놓여있는 십자가를 향해서 기어가는 장면입니다. 그렇게 심한 매질을 당하고 나서 자신을 못질하여 매달게 될 십자가를 향해 온 힘을 다해 기어가는 장면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깊은 의미를 던져주었습니다. 그 처절함을 그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화가 오히려 거북함을 주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수난의 극적인 장면에서 저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향한 뜨거운 열정이었습니다.
3.
자!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의 배경은 유월절 예루살렘입니다. 유대인에게 있어 유월절은 단순한 명절의 의미를 넘어서는 존재의 의미가 되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유월절의 명절을 참으로 성대하게 지냈습니다. 유월절의 의미는 유월(逾越), ‘지나치다’ ‘그냥 넘어가다’라는 뜻인데, 출애굽기 11장과 1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오기 전날 밤, 하나님은 애굽의 모든 집의 첫 것을 다 죽였습니다. 사람은 장자가 죽었고 짐승들도 첫것이 다 죽었으며, 온 애굽에는 그 날 밤 애곡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작은 것 하나도 다치지 않고 결국은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유월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하나님과 능력의 하나님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셔서 관여하시고, 삶 속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유대민족의 위대한 자부심과 그로 인한 민족의 결집을 의미하는 그런 절기입니다. 이 유월절은 유대달력의 1월 10일에 처음 난 어린 양을 골라 두었다가 14일 밤에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었습니다. 이 축제의 기간은 유대인의 자유를 향한 열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유월절의 힘찬 하나님의 소망과 능력을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유월절 죽음의 사신을 넘어가게 하여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고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성전은 이미 이전의 하나님에 대한 진정성을 가진 성전, 거룩한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모든 유대인들은 성전에 모이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전에는 성별된, 자신의 집에서 가장 아름답고 귀한 것으로 온 정성을 다해 준비하던 것이, 이제는 성전 마당에 펼쳐진 장사치들에게 제물을 사서 제단에 바치는 방식으로 점점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도 드라크마나 달란트를 세겔로 바꾸었는데 이것은 환전해주는 장사꾼의 배만 불리는 참으로 이상한 장터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가 되면 온 예루살렘은 양의 피가 넘치고 도살된 양들의 울음소리와 양을 태우는 연기와 냄새가 밤하늘을 뒤엎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경이로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경외심은 점점 사라지고, 자신들의 율법과 관습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맞추고 변질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 비참한 노예의 삶에서 해방을 주시고 광야에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하신 하나님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육신의 정욕에 끌어다 맞추려는 죄악 된 모습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채찍을 만드셔서 소와 양과 장사꾼을 밖으로 쫓아내시고 환전하는 장사꾼들의 판을 엎으셨습니다. 이 상황을 보던 제자들은 처음에는 대단히 의아하고 놀라워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화를 낼 일인가? 그리고 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상상도 못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시편의 말씀이 튀어나옵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이 나를 삼키리라”(시69:9)
4.
예수님은 채찍을 휘두르고 판을 엎으시므로 성전 뜰의 장사꾼들을 다 밖으로 쫓아내셨습니다. 주님의 태도는 준엄하셨고, 분노는 매서웠습니다. 그런데 진정 주님은 폭력으로 성전의 뜰을 정화시키셨습니까? 주님은 진정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시는 분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이전에 이 말씀을 보며 주님의 분노와 폭력성을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에 그 생각들을 바꾸고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짐승들을 매 놓았던 노끈으로 채찍을 꼬셨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채찍은 가죽 줄 끝에 추나 금속갈퀴를 달아서 몸에 닫기만 해도 살점이 떨어지게 만든 것이 채찍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벼운 노끈으로 채찍을 삼아 휘두르셨습니다. 주님의 휘두르는 채찍은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분노로 사람들을 정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옛날 어떤 작은 섬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왕국의 왕은 참으로 인자하고 명석하여 백성들을 사랑하고 또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백성들의 사랑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이 왕은 나라의 통치와 질서를 위하여 법을 세우고 자신이 스스로 법을 지켜 백성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와 온 백성들도 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의 어머니가 법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을 어기면 채찍으로 매를 맞아야했습니다. 왕은 고민했습니다.
만약에 매를 감하거나 벌을 면해준다면 백성과의 약속을 어기는 것이 되고, 반대로 매를 때릴 경우 어머니에 대한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왕의 고민은 깊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었습니다. 왕의 어머니는 형장으로 끌려 나와서 기둥에 매였습니다. 백성들은 모두 호기심과 근심어린 마음으로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은 명령했습니다. 채찍으로 죄인을 쳐라! 군중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군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형리는 채찍으로 사정없이 왕의 어머니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채찍이 어머니의 몸에 닫기 전에 먼저 왕이 달려 나와 어머니를 안은 채 채찍을 대신 맞았습니다.
채찍은 왕의 옷을 찢고 살을 뜯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를 질렀고 왕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왕은 어머니를 대신하여 매를 전부 다 맞았습니다. 그렇게 왕은 사랑하는 백성들과의 약속도 지키고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지켜내었습니다. 이후로 그 나라의 모든 백성들은 왕을 더욱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항상 법과 질서를 잘 지키고 서로 사랑하는 나라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왕의 백성과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은 백성들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고 이는 곧 백성들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입니다. 물론 어머니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지요. 왕은 자신을 던짐으로 백성과 어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왕은 절대로 자기가 가진 힘으로 백성을 다스리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채찍을 맞는 분이시지 때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절대로 폭력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깊고 섬세한 사랑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휘두르시는 노끈은 채찍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사랑의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육이 거룩한 성전으로 지켜지길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자리 잡고 있는 소와 양과 장사꾼들의 분비물과 탐욕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의 정화를 요청하시는 거룩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열정(Passion)인 것입니다. 그 열정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삼키운 바 된 것이지요.
열정! 그 강열한 사랑의 의지!
주님의 열정은 주린 백성들에게 오병이어의 큰 사랑으로 주린 배를 채우게 하시고, 주린 영혼을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열정은 파도에 휩쓸려가던 연약한 제자들에게 바다 위를 한걸음에 달려가서 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에 대한 주님의 열정은 산자로 일으켜 세우셨고, 이런 열정으로 주님은 세상 사람들이 비웃음을 칠 모습으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셨습니다. 작은 나귀새끼를 탄 주님의 모습에서 주님의 신실하심과 말씀의 성취를 향한 그 분의 뜨거운 열정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신의 깊은 고뇌와 갈등이 교차함에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모든 것을 다 포기했습니다. 잡히시기 전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26:26-28)
주님의 열정의 행로는 그렇게 십자가를 향하여 서서히 정리되고 통합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종내에 주님은 채찍질 당하고 능욕을 당하면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런 주님을 누가 공격적이며, 파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주님을 그 어느 누가 폭력적이라고 할 것입니까? 주님의 거룩한 분노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열정이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열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정은 두렵고 혼란스럽지 않고 지극히 감미롭고 사랑스럽습니다. 주님의 열정은 뜨거울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채찍은 우리를 향한 감미로운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 분의 우리를 향한 간절한 열망의 표현입니다. 그 분은 그 사랑으로 우리의 더럽혀지고, 손상된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성전으로 변화되길 원하는 열정을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의 그 열정으로 우리의 허물어진 성전이 재건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5.
심층심리학에 의하면, 사람은 출생의 과정을 통하여 세가지 욕구, 즉 안전과 생존, 힘과 통제, 애정과 존중이라는 기본적인 생물적 욕구를 가지고 이 세상에 들어오게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생물적 욕구들이 영유아기와 성장과정에서 적절하게 충족되지 않으면 사람은 이 세 가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적인 욕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채우기 위한 삶의 방식을 취하기 시작하고 이것들을 채우고 충족시키는 삶이 그 사람의 행복이 됩니다.
예컨대 어린 시절 환경으로부터 또는 사람으로부터 위협과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성장한 사람은 모든 대상으로부터 안정감을 취하는 것을 우선시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거나 위협을 받을 경우 불안해 하고 또는 그것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것을 먼저 취하고 챙깁니다. 대단히 이기적입니다. 즉 이 사람에게는 생존의 안전, 삶의 안정감을 향한 강한 열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끊임 없이 그것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힘과 통제의 결핌을 겪은 사람은 환경과 사람에게 권위를 내세우고 또 자신도 모르게 강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은 권위적인 사람이 되고 대화나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참지 못하고 힘들어 하거나 불안해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대화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만 합니다. 도무지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못합니다. 또한 가정 내에서도 다정다감하지 못하고 대단히 가부장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애정과 존중의 결핍은 사랑받지 못한 보상심리가 그 사람의 전 생애를 장악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애정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사람 저사람에게 전전합니다.
또 이런 경우 온전한 가정을 꾸리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온 생애의 열정을 진정으로 사랑해줄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며 열정을 불태웁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이 세가지 경우의 유사한 결핍이 있을 경우 이것을 추구하는 강한 열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러한 왜곡된 열망은 어떤 보상적인 것을 획득하더라도 그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이러한 욕망이나 왜곡된 열정을 채울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채우고 또한 그 채움으로 말미암아 행복을 느끼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결핍으로 인한 열망을 채워주지 않으시면 그 무엇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삶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교제하게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의 부족한 모든 것을 그 분이 채우시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또한 이전의 잠시 잠깐의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던 정욕과 열망이 점점 힘을 잃게 되고, 진정한 영혼의 안식과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기쁨을 맛본 사람은 절대로 이것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시간이 흐르면서 육신의 연약함과 환경의 지배로 말미암아 이런 기쁨은 서서히 사라지고 내 안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어가기도 합니다. 그리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으로 전락하게됩니다. 또한 이로 인하여 점점 세상의 것에 더 집착하고 매달리는 힘든 상황으로 내몰리게 됩니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주님을 향한 열정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회복되면 내 안의 예수가 다시 열정을 회복하면 우리의 삶은 다시 강한 힘과 기쁨과 열정에 쌓이게 되고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처음에 총각 때 아내를 향한 강한 열정을 이야기했습니다. 제 생애의 가장 뜨거웠던 그 열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을 생각해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한 뜨거운 열정으로 그 짧은 삶을 산화시킨 것 같이 나의 삶에 그런 뜨거움을 다시 한 번 담아보기를 진정으로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만약에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었다면 이런 열정을 회복하시기를 기도하고 열망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주를 사랑하는 그 열정이 나를 삼킬 때, 온전한 사랑에 눈을 뜨고 또 그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되고, 장성한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 질 때 그 때에야 비로소 사랑이 눈에 보이며, 그 사랑으로 세상만물이 명확하게 보인다. 세상의 진리가 이해되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신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즉 계시의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생명세계가 열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대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1-1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안의 성전이 회복되기를 열망하고 계십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정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예수를 향한 사랑의 열정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의 정욕과 왜곡된 열정을 잠재우고, 온전한 삶, 생명세계의 신비를 체험하는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강한 열정입니다. 그런 열정적인 삶을 살고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성전을 채찍으로 정화하시던 주님
그러나 주님은 폭력적인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요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우리를 아프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죄의 삯을 주님이 감당하셨습니다.
주님의 희생과 사랑은 참으로 감미롭습니다.
성전을 정화시킨 채찍은 실상 우리의 얼굴을
어루만지시는 자애로운 손길입니다.
그 부드럽고 자애로운 손길로
우리 속에 있는 주의 전을 회복시켜 주소서
그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연약하고 병든 곳을 치료하여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로 주님을 선명하게 바라보게 하시고
주를 향한 열정을 불태우며 거룩한 주의 전이 회복되게 하소서...
2010년 6월 세째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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